후백제(900)
- 견훤이 완산주(전주)에 도읍
- 오월과 외교 관계 체결
- 갱애왕 사살(신라에 적대적)
- 지나친 조세 수취, 호족 융화 실패
후고구려(901)
- 궁예가 송학(개경)에 도읍(마진) - 철원으로 천도(국호 태봉)
- 반신라정책, 새로운 관제와 신분제도 모색
- 지나친 조세 수취
- 궁예의 전제정치 - 궁예축출 후 왕위에 오름
고려건국(918)
- 왕건은 고구려의 후계자란 뜻에서 국호를 고려라 하고, 수도를 송악
- 새로운 국가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조세를 낮춰주고, 양민으로서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들을 해방
- 적극적으로 호족 세력들을 회유, 포섭
발해멸망(926)
- 거란 침입으로 멸망
- 고려가 발해유민 수용
후백제가 신라 공격(927)
- 왕건이 돕기 위해 출정, 공산전투에서 후백제에게 대패
- 고창(안동, 930) 전투에서 고려가 승리하면서 우위를 점함
- 후백제 내분 발생(935)으로 견훤 금산사에 유패
신라항복(935)
- 귀족분열
- 왕권미약
- 호족세력 난립
- 농민반란
- 사회혼란
후백제 멸망(936)
- 왕건 + 견훤과 함께 일리천(선산)전투에서 후백제에게 승리
- 후삼국 통일
견훤 경주 침공(927) - 공산전투(927, 견훤 승) - 고창전투(930, 왕건 승) - 견훤 금산사 유폐 및 고려귀순(935) - 경순왕 항복(935) - 일리천전투(936, 왕건 승) - 후삼국 통일
기출문제
지난날 신라의 정치가 쇠하여 도적들이 다투어 일어나고 백성들은 난리 통에 그들의 폭골(曝骨)이 들판에 널렸다. 전 임금이 온갖 혼란을 평정하고 국가 기초를 닦았으나 말년에 와서는 무고한 백성들에게 피해를 끼쳤고 국가가 멸망하였다. 내가 그 위기를 이어 새 나라를 창건하였는데 백성들에게 고된 노동을 시켜 힘들게 하는 것이 어찌 내가 원하던 일이겠는가? 다만 모든 일을 시작하는 때라 일이 부득이 하여 그런 것이다.(중략) 『고려사』권2, 「세가」2 태조 17년 5월 을사
밑줄친 '내'가 누구인지 확인 하고 그가 시행한 정책 알아보기-고려(왕 중심의 업적) 참조
(태조 8, 925년) 12월에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켰다.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인데,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 때 고구려인 대조영(大祚榮, ?~719)이 달아나 요동(遼東)을 차지하고 지키니 당나라 예종(睿宗)이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봉하였다. 그 뒤에 스스로 발해국이라 칭하고 부여(扶餘)⋅숙신(肅愼) 등 10여 국을 아울러 차지하였다. 문자⋅예악(禮樂)과 관부(官府) 제도가 있었고, 5경(京)⋅15부(府)⋅62주(州)를 두었으니, 땅이 사방 5000여 리(里)이며 인구는 수십만이었다.
『고려사절요』권1, 태조신성대왕 을유 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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